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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중한 자료방

문극겸 할말은 하는 청렴했던 文臣

 

문극겸선생 영정

 

잘 드는 칼로 단번에 죽여달라"
직필 때문에 새로 편찬한 의종실록
최세보와 '자리 양보 다툼'으로 칭송받아

고려 18대 국왕 의종(毅宗)은 향락에 빠져 무신란을 자초했다는 점에서 조선의 연산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의종24년(1170년) 8월 30일 정중부(鄭仲夫) 이고(李高) 이의방(李義方)이 이끄는 무신들은 이날도 술에

취한 의종을 모시고 있던 문관과 대소신료, 환관 등 100여명을 순식간에 학살했다.

9월 1일에도 의종을 수행하던 환관 등 10여명을 벴고 9월 2일에는 의종을 거제에, 태자를 진도에 유배 보내고 태손은 죽여버렸다. 이후에도 문신들에 대한 사냥이 계속돼 저잣거리에 시체가 산같이 쌓였다.

이런 경황 중에도 죽음을 면한 두 문신이 있었다.

'외교의 달인' 서희의 현손(玄孫) 서공(徐恭)과 충직함으로 무장들로부터도 존경을 받았던 문극겸(文克謙·1122~1189년)이다. 서공의 경우 일찍부터 문신들의 오만함을 미워했고 무인들을 예우했기 때문에 난리통

속에서도 중방(重房·무신들의 권력기관)에서 22명의 순검군을 보내 호위해주었다.

문극겸은 의종 때 과거에 급제해 좌정언(左正言·조선 때의 사간원 관리)으로 있으면서 의종의 침실 앞에 엎드려 당시 국정을 농간하던 내시 백선연, 궁녀 무비, 술사 영의, 지추밀사 최유칭 등 4인의 이름을 직접 거론하며 당장 내쳐야 한다고 직간(直諫)했다고 오히려 지방 말직으로 쫓겨난다.

오랜 지방 생활 끝에 어렵사리 중앙으로 돌아온 문극겸은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조선시대 종친부나 종부시에 해당하는 전중성의 6품 벼슬)로 있을 때 정중부의 난을 맞았다.

마침 난리가 터진 8월 30일 문극겸은 전중성에서 당직을 서고 있다가 병사들에게 체포되었다.

문극겸은 당당했다.

 

"왕이 만일 내 말을 들었다면 어찌 이런 지경까지 되었겠는가? 잘 드는 칼로 단번에 죽여달라!"

병사들은 특이한 인물이라고 여기고 상부에 보고하자 장군들은 하나같이 "이 사람은 우리가 전부터 듣던 이름이다. 죽이지 말라"고 명하고 궁성에 가둬 놓았다. 이때 문극겸의 나이 49살이었다.

의종의 뒤를 이어 친동생 명종(明宗)이 왕위에 오르면서 문극겸도 석방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무신들, 특히 이의방의 천거로 우승선(右承宣·조선 때의 승지)에 발탁되며 무관직인 용호군 대장군까지 겸직하게 된다. 이런 인연으로 문극겸의 딸은 이의방의 아우 이린(李隣)과 결혼하게 된다.

바로 이 이린이 이성계의 6대조이다.

조선이 들어서고 4대조인 이안사부터 목조(穆祖)로 추존했는데 이안사의 아버지 이양무가 이린의 아들이다.

문극겸에게도 위기의 순간이 있었다.

명종4년(1174년) 12월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들여 전횡을 일삼던 이의방을 정중부가 제거해버린 것이다.

정중부는 이의방에 비하면 비교적 온건한 편이었다. 수하 장수 이의민으로 하여금 경주에 있던 의종을 죽이게 만든 것도 이의방이었다.

그러나 문극겸은 화(禍)를 당하지 않았다. 그는 예부시랑(예조참판)을 거쳐 핵심 요직인 추밀원사에까지 올랐다가 명종9년 7월 정중부의 측근 송유인과 갈등을 빚다가 좌복야로 좌천되기도 했다.

다행히 두 달 후 경대승이 정중부와 송유인을 제거하는 바람에 문극겸은 관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문극겸은 무엇보다 명종의 총애를 받았다. 청렴함도 한 가지 이유였다.

고려시대를 이야기하면서 문극겸의 이름을 기억해야 하는 또 한 가지 이유는 의종실록 편찬 문제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경우 선조실록/선조수정실록, 현종실록/현종개수실록, 숙종실록/숙종보궐정오, 경종실록/경종수정실록처럼 후대에 정권을 장악한 당파에 따라 실록을 다시 쓰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고려의 경우 바로 이 '의종실록'만이 다시 집필되는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명종14년 문극겸은 실록 편찬 책임을 맡은 수국사(修國史)가 되어 의종실록을 편찬하면서 '임금을 죽인 것은 천하의 제일 큰 악'이라고 직필했다가 무신들의 반발을 사게 된다.

그래서 중방에서는 무관 출신으로 문하시랑 평장사(종2품) 겸 병부판사(병조판서)로 있던 최세보(崔世輔)로 하여금 다시 고쳐 쓰게 한다. 이 사실을 접한 문극겸은 명종에게 은밀히 보고했으나 힘없는 명종은 결국 최세보를 동수국사(同修國史·同은 副)로 임명해 실록을 다시 쓰도록 한다.

'고려사'는 "최세보가 임의로 사실을 왜곡하여 역사를 기록하였다. 이로 인해 의종실록은 누락되고 생략되어 사실과는 부합하지 않는 것이 많다"고 적고 있다.

최세보가 문관 전담직인 동수국사를 맡았다는 소식을 접한 문극겸은 사료들을 햇볕에 말리는 건물인 쇄사당(?g史堂)에서 최세보를 만나 "문관으로서 상장군이 된 것은 내가 처음인데, 무관으로서 동수국사가 된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오"라고 뼈있는 농담을 던진 후 껄껄 웃었다고 한다.

사실 문극겸과 최세보 두 사람은 각각 문관과 무관 출신이었지만 서로 챙겨주는 사이이기도 했다.

명종15년 문극겸이 예부판사(예조판서)가 되어 먼저 병부판사가 된 최세보의 다음 자리에 앉으려 하자 최세보 역시 극구 사양했다.

"나는 문공에게서 참으로 많은 은혜를 받았는데 어찌 감히 그 윗자리에 앉을 수 있겠습니까?"

결국 명종이 나서 예부가 병부보다 윗자리라고 조정함으로써 두 사람의 자리 양보 싸움은 끝날 수 있었다.

 

"당시 식자들이 두 사람의 자리 사양을 칭찬했다."

이듬해 문극겸은 정승과 병부판사를 겸하고 이어 문관의 인사를 책임지는 이부판사로 있다가 명종19년(1189년) 6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다. 이부판사의 후임은 최세보였다.

아쉽게도 최세보는 문극겸의 청렴은 계승하지 못했다. "그는 뇌물의 다소(多少)에 따라 벼슬을 올리고 내리고 하여 수만의 재물을 축적하였다." 최세보는 그나마 고려사 명신전에 이름을 올렸지만 아들 최비는 태자의 여종과 간통 행각을 일삼다가 최충헌에게 멸문지화를 당하게 된다.

 

 

 출처;조선일보(이한우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