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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중한 자료방

조선에 옷을....문익점


 

문익점 선조.

 

 

 

 

 

 

 

 

 

 

위 사진은 ' 문익점목면유전비(文益漸木棉遺田碑) '로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제오리에 있다. 목화(木花) 재배를 처음 시작하였던 유전(遺田)에 문익점(文益漸)의 후손들이 세운 비(碑)로, 1909년 건립되었다. 조선 후기의 학자이자 항일의병장으로 활동했던 '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가 ' 충선공삼우당문선생목면유전표 (忠宣公三憂堂文先生木棉遺田表) '라는 비문(碑文)을 지었다. '김도화'는 ' 이곳은 충선공(忠宣公) 삼우당(三憂堂) 문선생(文先生)이 처음으로 목면을 심으셨던 유전(遺田)이다 '로 시작하는 명문(銘文)을 통해 문익점의 공적을 칭송하고, 목화전래에 대한 감회와 글을 짓게 된 경위 등을 밝혔다.

 

 

 

 

경상남도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에 있는 서원. 1401년(태종 1)에 창건되었으며 문익점(文益漸)의 위패를 모셨다. 1554년(명종 9)에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

 

 

 

문익점 신도비

 

문익점묘 숲길

 

三憂堂(삼우당) 문익점 (封.江城君 諡.忠宣公) 묘   <경남 산청군 신안면 산안리>
(서기 1331년~1400년)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는 사적 제108호로 지정된 '목면시배유지(木棉始培遺址)' 즉 문익점(文益漸)과 그의 장인 정천익(鄭天益)이 처음으로 목화를 재배한 터가 있다. 그리소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에는 문익점을 기리는 도천서원(道川書院)이 있다. 1461년(세조 7)에 문익점을 기리는 사당(祠堂)을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무너진 것을 중건하여 1787년(정조 11)에 도천서원(道川書院)이라는 편액을 내린 것이 그 유래이다. 

 

 

문익점을 추모하기 위하여 1461년(세조 7)에 나라에서 사당(祠堂)을 세웠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디었다가 중건되었다. 정조 11년인 1787년에 '도천서원(道川書院)'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았다.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으나, 1891년 단성(丹城)의 사림(士林)들이 노산정사(蘆山精舍)라는 이름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였는데, 그 후 1975년 사당인 삼우사(三憂寺)를 새로 건립하고 복원되었다.  

 

 

 

 

 

                                             문익점은 누구인가 ?

 

 

 

 

 

목화에서 실을 뽑는 기계를 '물레'라고 한다. 기계를 만든 사람의 성명 '문래'에서 따온 이름이다. 문래(文來) ...문익점의 손자이다. 그런가 하면, 목화를 재배하여 만들어낸 옷감을 '무명'이라고 한다. 옷감 짜는 베틀을 만들고 베 짜는 방법을 창안한 사람의 이름 '문영'에서 따온 이름이다. 문영(文英), 역시 문익점의 손자이다. 

 

 

그리고 의성(義城)에 목화를 크게 심어 우리 민족 모두가 '백의민족'의 따뜻함을 맛볼 수 있게 해준 사람은 의성현감으로 있던  '문승로(文承魯)' 또한 문익점의 손자이다. 처음으로 목화 재배에 서공하고, 그것으로 옷감을 만드는 방법까지도 연구해낸 정천익(鄭天益)은 문익점의 장인(丈人)이다. 

 

 

 

 

 

 

 

 

 

문익점(文益漸)의 본관은 남평(南平)이며, 자(字)는 일신(日新), 호(號)는 삼우당(三憂堂), 초명(初名)은 익첨(益瞻)이다. 진주(晉州) 강성현(江城縣 ..지금의 경남 산청) 출신으로 아버지 문숙선(文淑宣)은 과거시험에는 합격하였으나 벼슬을 하지는 않았다. 문익점은 공민왕 9년인 1360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김해부사록(金海府司錄)으로 임명되었으며, 성균관의 순유박사(諄諭博士)를 거쳐 1363년에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종육품(從六品) 벼슬인 좌정언(左正言)이 되었다.   

 

 

 

 

                                               붓두껍에 숨겨온 목화씨 ?

 

 

 

 

그리고 그 해에 계품사(啓稟使)로 원(元)나라로 파견된 좌시중(左侍中) 이공수(李公遂)의 서장관(書壯官)으로 중국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목면(木棉)나무의 씨앗을 가지고 돌아왔다. 당시 붓두껍에 목화씨를 몰래 숨겨서 가지고 돌아왔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이는 후대(後代)에 그의 업적을 추앙하는 과정에서 긴장감을 높이기 위하여 덧붙여진 이야기로 추정되고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의 태조 7년 6월 13일자 에는 ' 길가의 목면(木棉) 나무를 보고, 그 씨 10여 개를 따서 주머니에 싸 가지고 와서 ...'라고 기록되어 있어, 가지고 들어온 씨앗의 수(數)는 차이가 있지만 붓두껍에 감추어 들어왔다는 이야기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목화씨를 붓두껍에 숨겨 왔다는 것은 조선 후기부터 유행된 이야기이다. 고려 말, 조선 초의 기록에는 그가 목화씨를 '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왔다 거나 ' 그냥 얻어 갖고 왔다 '라고만 되어 있다. 조선 정조(正祖) 시절의 규장각 학사, 이덕무(李德懋)는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의 앙엽기(秧葉記)라는 글에서 상투 속에 씨앗을 숨겨왔다는 설을 전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붓두껍 전설은 문익점이 목화씨를 들여온 사건을 더욱 극적으로 부각시키고 싶은 많은 사람들의 의도가 낳은 전설인 셈이다. 더욱이 당시 원나라가 정말로 목화씨가 국외(國外) 반출 금지품목이었는지에 대하여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귀양갔다 돌아오는 길에 ?

 

 

 

 

 

 

문익점은 중국 강남에 유배되어 3년 뒤 풀려나 돌아오는 길에 붓두껍에 목화씨를 몰래 숨겨가지고 귀국하였다 ... 이러한 줄거리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문익점의 목화씨를 우리나라에 전파한 경과이다. 문익점은 과연 중국 강남에서 유배(유配)생활을 하였을까 ?문익점이 중국 원(元)나라에 사신으로 가있을 때, 당시 원(元)나라는 반원(反元) 정책을 펴고 있던 공민왕(恭愍王)을 폐위(廢位)시키고,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德興君)'을 새로운 왕으로 세우려 하고 있었다. 

 

 

특히 고려 출신 기황후(奇皇后)는 고려 안에서 자신의 동생 등 '기씨(奇氏)' 일족을 몰아낸 공민왕을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었다. 드디어 덕흥군(德興君)은 원나라가 내어준 군사 1만 명과 함께 고려를 공격하기 위해 출발하였다. 원나라에 머물고 있던 고려인들은 덕흥군을 왕(王)으로 모시라는 압력을 받았다. 문익점을 비롯한 다수의 고려인들이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그러나 덕흥군의 군대는 최영(崔瑩)과 이성계(李成桂)장군의 지휘 하에 맞서는 고려군에 패배하였고, 원나라는 덕흥군을 왕으로 옹립하려던 뜻을 포기하여야 했다. 문익점이 귀국하여 고향으로 돌아간 것은 덕흥군 관련 행적 때문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낙향(落鄕)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원나라에 머물던 상황에서 원나라의 압력을 이기기 어려웠다는 일종의 정상 참작이 이뤄진 게 아닐까 하는 추정도 가능하다. 그는 이후 1375년(우왕 원년)에 다시 전의주부(典儀注簿)로 등용되었다. 

 

 

문익점은 진주 강성현 사람인데 고려의 사명(使命)을 받들어 원나라에 갔다가 덕흥군(德興君)에 부(附 .. 덕흥군 편에 섰다가)하였다가, 덕흥군이 패하므로 돌아왔는데, 목면(木棉)의 종자를 얻어 와서 그 장인(丈人) 정천익(鄭天益)에게 부탁하여 심게 하였다. 그러나 거의 다 말라죽고 한 포기만 살아 3년 만에 크게 번식되었다. 씨 뽑는 기구와 실 빼는 기구도 모두 정천익(鄭天益)이 창제하였다.... 고려사 열전    

   

    

문익점의 '강남 귀양설'의 초기 근거는 조선 태종 1년(1401)에 권근(權近)이 문익점의 아들에게 벼슬을 내리자 상소(上疏)하면서 ' 문익점이 강남에 들어가 목면(木棉) 종자 두어 개를 얻어 싸가지고 와서 .. 得木棉種 ' 라고 언급한 부분이다.

 

 

이후 여러 글에서 ' 강남에귀양 갔다 '고 언급되면서 최종적으로는 19세기 '남평 문씨' 문중에서 펴낸 '삼우당실기(三憂堂實記)'에 집약되어 ' 강남에 유배되어 3년 뒤 풀려나 돌아오는 길에 목화씨를 붓두껍에 넣어가지고 귀국하였다 '는 이야기가 완성된 것이다. 덕흥군(德興軍) 편에 섰다는 고려사(高麗史)의 기록과는 달리 덕흥군 옹립에 반대하다가 귀양을 간 것으로 바뀐 것이다.

 

 

즉, 문익점의 증손인 문치창(文致昌)이 1464년에 편찬한 '가장(家壯)'을 비롯하여 '남평문씨'의 가전을 집대성한 '삼우당실기(三憂堂실記 .. 1819년)'에는 고려사(高麗史)의 기록과는 정반대의 기록이 나온다. 그 기록에 따르면, 문익점은 ' 하늘에는 두 해가 없고, 백성에게는 두 군주가 없다 '고 하면서 원제(元帝)와 덕흥군(德興君)쪽의 끈질긴 회유와 압력을 물리치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끝내 지킨다. 그러자 원나라 황제는 그를 42일간 구류했다가 그래도 불복하니 운남지방으로 유배를 보냈는데, 거기서 3년간 귀양살이를 하다가 풀려나 원나라 수도로 돌아오는 길에 목화씨를 구해가지고 1367년에 귀국하였다고 한다.   

 

 

 

 

 

 

                                                  문익점 목화씨는 최초이었는가 

 

 

 

 

 

문익점이 목화씨를 들여오기 전까지 이 땅에는 면직물(棉織物)이 전혀 없었을까? 당(唐)나라 때 편찬된 역사서 '한원(翰苑)'에는 고구려가 백첩포(白疊布)라는 면직물을 생산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삼국사기(三國史記) 신라 경문왕조에는 869년 7월에 다른 여러 물품과 함께 백첩포(白疊布) 40필을 당나라에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2010년 7월에는 국립부여박물관이 1999년부터 부여(扶餘)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된 백제시대의 직물(織物) 1점을 분석한결과, 우리나라 땅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면직물임을 확인하였다고 발표했다 (아래 사진).  

 

 

 

 

 

 

 

 

 

이러한 역사의 기록과 유물(遺物)로 볼 때 문익점이 목화씨를 들여오기 전에도 한반도에서 면직물이 생산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문익점이 들여온 목화가 인도종이며, 그전 한반도에서 만들어진 면직물의 원료는 아프리카종, 즉 초면(草棉)이었다는 설이 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목화와는 다른 원료이었다는 것. 또한 삼국시대의 목화는 중앙아시아 품종이어서 우리 토양과 기후와 잘 맞지 않아 대량 재배되기는 힘들었고, 면직물도 대외 교류 등에서 소량이 사용되는 매우 귀한 직물이었다는 주장이 있다. 

 

 

결국 우리나라 기후와 토양에 맞게 적응되어 본격적으로 목화의 대량 재배와 면직물 생산이 이어진 것은 문익점 이후의 일이라는 것이다. 문익점이 들여온 목화씨가 방적하기 편한 종류의 것으로 대량 생산에 적합하였으리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삼국시대 면직물 생산이 확실하다고 하더라도, 한반도 목화 재배의 역사와 면직물의 역사에서 문익점이 차지하는 중요성에는 변함이 없다.    

 

 

 

 

                                                    재배와 보급             

 

 

 

 

 

 

태조실록. 태조 7년 6월13일 기사  ....태조 7년(1398) 6월 중에 전(前) 좌사의대부 문익점(文益漸)이 세상을 떠났다. 문익점은 갑진년에 진주(晉州)에 도착하여 가져온 씨앗 반(半)을 본 고을 정천익(鄭天益 .. 문익점의 장인)에게 주어 기르게 하였는데 겨우 하나만 살았다. 정천익(鄭天益)이 가을에 씨를 따니 100여 개나 되었다. 해마다 더 심어서 정미년 봄에 그 씨를 향리(鄕利)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심어 기르게 하였는데, 문익점 자신이 심은 것은 모두 꽃이 피지 아니하였다. 중국의 중 홍원(弘願)이 정천익의 집에 이르러 목면을 보고는 너무 기뻐 울면서 말하였다. ' 오늘날 다시 본토의 물건을 볼 줄은 생가하지 못하였씁니다'. 정천익은 그를 머물게 하여 며칠동안 대접한 후에 이내 실 뽑고 베 짜는 기술을 물으니, 홍원(弘願)이 그 상세한 것을 자세히 말하여 주고 또기구까지 만들어 주었다. 정천익이 그의 집 여종에게 가르쳐서 베를 짜서 한 필을 만드니, 이웃마을에서 전하여 서로 배워 알아서 고을에 보급하고, 10년이 되지 않아서 또 한 나라에 보급되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니 홍무(洪武) 을묘년에 문익점을 불러 전의주부(典儀主簿)로 삼았는데, 벼슬이 여러 번 승진되어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에 이르렀다가 졸(卒)하니, 나이 70세이었다.    

 

 

 

문익점 이전에도 누군가 목화씨를 들여와 심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더러는 목화 재배에 성공한 사례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거기까지이었다.  도입(導入)은 했을지언정 그것을 이 땅에 정착시키고 재배법과 면직물 생산기술을 널리 보급시키지는 못했던 것이다.

 

 

문익점과 그의 장인 정천익(鄭天益)은 살아남은 한 그루를 다시 3년간 가꾸어 대량 재배이 가능성을 열었다. 또한 원나라 승려 홍원(弘願)의 도움을 받아가며 솜에서 씨앗을 빼는 씨아와 실을 잣는 물레를 만들어 보급하였다. 문익점의 큰 공로는 목화씨를 들여온 사실 자체보다는 바로 이러한 정착과 보급에 있었다.  

 

 

 

 

                       문익점면화시배지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 있으며, 사적 제108호로 지정되어 있다. 1363년(공민왕 12), 문익점이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귀국할 때 목화씨를 가지고 와서, 그의 장인 정천익(鄭天益)에게 부탁하여 자신의 출생지인 단성 땅에서 재배하게 하였다. 이곳이 바로 문익점에 의하여 들어온 목화가 번식에 성공하였던 옛터이다.  

 

문익점 면화전시관

 

 

 

 

 

 

 

 

 

  

 

목화 시배(시배)의 터전으로 알려진 이곳은 '배양(培養)마을'로 불리며, '삼우당선생면화시배사적비(三憂堂先生棉花始培事蹟碑)' 라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 사적비는 이 지역 사림(士林)과 후손들으 노력으로 1965년 건립되었으며, 또한 시배유지(始培遺址) 안에는 문익점의 효행을 기리는 '삼우당효자비'와 문익점의 업적을 기리는 부민각(富民閣)이 있다.

 

 

이곳 시배유지(始培遺址) 안에는 효자각(孝子閣)이 있는데, 문익점의 효심(孝心)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문익점이 청도군수로 있을 때 모친상을 당하여 여막을 짓고 모친의 묘를 지키던 중 왜구(倭寇)가 침입하였다고 한다. 왜구(倭寇)의 장수는 모친의 묘를 지키고 있는 문익점의 효심을 기리기 위하여 ' 물해효자 (勿害孝子 .. 효자를 해치지 말라)라는 말을 남기고 철수하였다고 한다. 후에 문익점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고려 우왕(禑王)이 직접 하사한 효자비(孝子碑)가 바로 그것이다. 효자비 옆으로는 약 200평 정도의 부지에 면화를 재배하고 있다.  다음 사진은 문익점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면직물 제작 과정의 모습이다.

 

 

    

 

 

  

씨아기 작업 ... 목화를 재배 수확하여 건조한 솜을 먼저 씨아에 넣고 돌리면 틈사이로 통과하면서 뒤쪽으로 빠져나가고, 씨는 굵기때문에 틈을 통과하지 못하고 앞으로 떨어진다. 활타기(솜타기) .. 씨를 뺀 솜을 대나무를 휘어서 활처럼 만든 무명활로 타는데, 활 끝의 진동에 따라 솜이 뭉게뭉게 부푼다. 현대에는 타면기를 이용하여 많은 양의 솜을 빠른 시간에 솜타기를 하고 있다.  

 

 

  

 

고치말기 .. 수수깡이나 참대를 가운데 끼우고 솜을 손으로 비비면서 길고 둥글게 말아 빼면 고치가 된다. 이 과정은 솜에서 실을 뽑아내기 위해서 짧은 섬유를 서로 엉키게 하는 작업과정이다.

 

 

  

 

실뽑기 (실잣기 물레질) ... 고치솜을 둥글게 말아 고치에서 실을 뽑아낸다. 떡가래처럼 길게 만 고치를 손가락에 끼우고 처음에는 끝부분의 솜을 인위적으로 꼬아 조금 뽑아내어 물레의 가락에 걸어 고정시킨 다음 다른 손으로 물레를 돌려 가락이 회전하면서 꼬임이 주어져 고치의 솜이 실로 이어져 감기게 되는 과정이다.

 

 

  

 

무명배기(베배기) ...  베 짜기를 할 때 실의 강도를 높이고 엉킴을 방지함르로써 일의 능률을 높이기 위하여 날실에 풀을 먹인 다음 아래에 불을 지펴서 풀이 빨리 마르도록 하여 도투마리에 감는다. 풀칠하는 솔은 나무의 잔뿌리로 만든 솔을 사용한다.

 

 

 

 

 

 

베짜기 ... 도투마리를 베틀에 올려놓고 잉아를 걸고 북에 씨실을 달아 날실의 위아래로 벌어진 개구사이로 북을 통과시켜 바디를 당겨서 치며 옷감을 짜는 과정이다. 이 작업을 하면서 부르는 길삼노래가 '베틀노래'이다. 

 

 

 

 

                                         목면화기                     木棉花記

 

 

 

 

이 목면화기(木棉花記)는 목화의 도입 내력과 문익점(文益漸)의 약력과 사적 등을 기록한 책으로 필사본이다. 이 책을 지은 편자와 편찬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우리나라에 목화가 들어온 내력과 그 가공법의 개발 경위 등을 밝힌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으며, 농업기술사 연구에도 필요한 문헌으로 활용되고 있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이 책은 5장에 불과한 간단한 책이다. 이 내용에는 남명 조식(남명 조식)이 지은 '목면화기(목면화기)'와 김도화(金道和)가 쓴 '충선공삼우당문선생목면유전표 (忠宣堂三憂堂文先生木棉遺田表)'와 문익점의 간단한 약력과 사적을 모아놓았다. 조신(曺植)의 기문은 문익점이 목화를 원나라에서 들여오게 된 경위와 문익점의 장인(丈人) 정천익이 원나라 승려의 도움으로 목화에서 씨를 빼고 물레를 이용하여 옷을 짓는 방법을 전해받게 되었다는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이 책의 끝에는 조식(曺植)의 시(詩)가 덧붙여져 있다. 본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본디 우리나라에는 목화가 없었는데, 고려 공민왕 때(160년), 진주 사람 문익점이 사간원 좌정언으로 있으면서 봉사(奉史)로 원나라에 간 지 3년이 되는 가을 귀국할 때 길가의 밭에 눈송이같이 흰꽃이 있어 이를 기특히 여겨 종자(從者) 김룡(金龍)으로 하여금 여러 걔를 따오도록 하였다. 그러자 밭을 지키고 있던 노파가 이르기를 이는 국가가 금하는 바로 외국인이 이를 절취한 즉시 자기도 같은벌을 받게 된다고 말리는 것을 뿌리치고 가져온 것이다.

 

 

다음해 꽃밭에 이를 심었고, 그 뒤 성공하여 종자를 나누어 전국에 퍼뜨린 것이다. 그러나 목화씨를 어떻게 제거하고 실을 어떻게 뽑을 지 모르던 차에 호승(胡僧)이 우리나라 산천을 두루 다니며 구경하다가 문익점의 장인 정천익(鄭天益)의 집에 머물러 있던 중, 홀연히 목화를 보고서 울면서 고향에서 목화를 본 지 수년 만에 이국(異國)에서 번성하는 목화를 보니 자연스레 눈물이 난다고 하였다.

 

 

이에 호승(胡僧)으로부터 씨를 빼는 씨아와 실을 뽑는 물레 등을 배워 의복을 짜서 입게 되었으니, 문익점의 공(功)은 태산이나 하해(河海)에 비길 만하다. 이러한 본문의 끝부분에 조식(曺植)의 한시(漢詩)가 있는데, 그 내용은 문익점의 공(功)이 백곡(百穀)을 처음 재배한 후직(后稷)의 공과 같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익점이 처음 목화를 재배한 유전(遺田)에 세운 기념비의 비문(碑文)이 들어 있는데, 그 요지는 이곳은 문익점이 비로소 목화를 재배한 유전(遺展)이며 그가 세상을 뜬 지 500여 년이 지난 이제 이 기념비를 세우면서 그의 공(功)을 기리되 조식(曺植)의 한시(漢詩) ' 백성들에게 옷을 입히니 후직의 공과 같도다. 衣被生民后稷同 '를 인용하면서 지잡의 여러 선비들이 의논하여 이 기념비를 세운다는 것으로 되어 있다. 약력란에는 문익점의 약력이 기록되고, 사적란에는 ' 문익점이 봉사(奉使)로 중국에 가서 목화씨를 가져왔고, 그의 장인 정천익(鄭天益)이 이를 심었으나 처음 재배법을 몰라 마침내 한 나무밖에 남지 않앗으나 3년 째에 크게 잘 자랐다 고 하며, 그 유적지는 의성군 산운면 제오동에 있다 '고 기록되어 있다.        

 

 

 

 

 

 

 

 

 

 

 

 

 

 

 

 

 

 

 

 

                                                  문익점의 공로

 

 

 

 

 

 

 

 

 

 

 

문익점 이전에도 누군가 목화씨를 들여와 심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더러는 목화 재배에 성공하였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기까지이었다. 도입(導入)은 했을지언정 그것을 이 땅에 정착시키고 재배법과 면직물 생산기술을 널리 보급시키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문익점과 정천익은 살아남은 한 그루를 다시 3년 간 가꾸어 대량(大量) 재배의 가능성을 열었다. 또한 원나라 승려 홍원(弘願)의 도움을 얻어 솜에서 씨앗을 빼는 씨아와 실을 잣는 물레를 만들어 보급하였다. 문익점의 큰 공로는 목화씨를 들여온 사실 자체보다 바로 이러한 정착과 보급에 있었다.  

 

  

 

 

                                                 헐벗고 굶주린다

 

 

 

 

백성들의 고달픈 삶을 나타내는 ' 헐벗고 굶주린다 라는 표현이 있다. 이 땅에서 목면9목면)이 일반화되기 전까지 백성들 대부분은 베옷으로 사시사철을 지내야 했다. 여름에야 통풍이 잘되어 시원하다고 하지만, 한 겨울에도 베옷을 입고 지내야 하는 고통은 바로 ' 헐벗은 고통' 그것이었다. 베옷 안쪽에 풀잎이나 짐승의 털을 넣기도 하였지만, 삼베옷을 가지고서는 보온(保溫) 효과를 보기 힘들었다. 문익점이 널리 존경받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이렇게 '헐벗었던' 백성들의 의생활(衣生活)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는 점에 있다.

 

 

 

                                      국가경제에 큰 기여 그리고 산업혁명

 

 

 

더욱이 문익점에서 시작된 목면(木棉) 생산은 조선시대 들어와 국가 경제에 큰 기여를 하였다. 일일이 손으로 실을 만들어야 하고, 마(麻)를 가공하는 과정에서 남성 노동력이 많이 드는 '베'와 비교하면, 씨아와 물레를 사용하는 목면(木棉)은 생산성이 매우 높고 여성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었다.

 

 

 

 

 

 

목화 재배와 목면(木棉)의 생산을 특히 적극적으로 장려하였던 세종(世宗)이 문익점(文益漸)을 ' 부민후(富民侯) ' 즉, 백성을 풍요롭게 만든 이로 추증(追贈)토록 한 것은 농가경제를 두텁게 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 결과이다. 문익점은 민생 향상과 국부(國富) 증진에 큰 도움이 되는 하나의 새로운 산업(産業)을 탄생시킨 인물로 존경받았다.

 

 

문익점에 의한 목화씨의 전래와 재배 및 목면의 생산은 우리나라 직물사뿐만 아니라 ,산업구조나 생활문화에도 일대 혁명(革命)을 일으켰다. 포근함 솜과 질긴 무명은 옷감의 개조와 향상에서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였고, 씨아나 물레, 가락, 날틀 같은 면직기구의 제작은 생산도구(生産道具) 제작의 단초를 열었으며, 탈지면은 지혈(止血)이나 외과치료용으로 쓰이고, 솜은 초나 화약(火藥)의 심지로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내구성(耐久性)이 강한 무명실로 만든 바느질 실이나 노끈, 낚싯줄, 그물은 일상용품을 일신시켰다. 그런가 하면 무명은 물물교환에서 통화(通貨)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하였고, 일본이나 중국에 대한 주요 수출품의 하나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문익점에 의한 목화씨 전래(傳來)와 그 생산물인 목면(木棉)은 물 속에서부터 하늘까지 우리 민족의 생활영역을 전례없이 넓히고 풍부화시켰으며, 사회발전 전반에서 가위 혁명적(革命的)인 변혁을 가져왔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은 문익점의 목면(木棉) 전래를 통하여 이 나라의 의관문물(衣冠文物)을 일신시켰다고 하고, '남명 조식(南溟 曺植)'은 ' 백성들에게 옷을 입힌 것이 농사를 시작한 옛 중국의 후직(后稷)씨와 같다. 의피생민후직동 ' 라는 시(詩)를 지어 칭송하였으며,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도 ' 이전의 사람도 문익점 같은 이 없었고, 이후의 사람도 또한 문익점 같은 이 없었으며, 이후의 이후에도 역시 문익점 같은 이 없을 것이다 '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공적이 지대한만큼 나라의 포상도 성대하였다. 고려 우왕(禑王) 때에는 문익점이 살던 마을인 배양리(培養里)에 효자비(孝子碑)를 세우고, 조선 정종 때에는 그가 세상을 뜨자 묘사(廟祠)를 짓게 하였으며, 태종 때에는 조선왕조에서 관직을 지내지 않았음에도 예문관제학을 하사하였고, 강성군(江城君)을 봉하면서 시호(諡號)를 충선(忠宣)이라 했으며, 부조묘도 세우게 하였다. 세종(世宗)에 이르러서는 영의정을 증직하고, 그가 백성의 살림을 넉넉하게 하였다고 해서 '부민후(富民侯)'라는 칭호를 추서하였다.     

 

 

 

                                                국제무역의 한 축이 되다 

 

 

 

세종(世宗) 때인 15세기 중반부터 면포(棉布)는 국가 경제와 세금(稅金) 체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 시기부터 면포(棉布)는 마포(麻布)를 대체하여 화폐(貨幣)와 같은 위상을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도 길이 약 16m, 폭(幅) 약 33cm를 한 필(필)로 하고, 실 여든 가닥을 1승(升)으로 하여 5승포(升布)를 정식 규격 품질의 면포 즉, 정포(正布)로 정하였다. 조선전기 면포(棉布)의 가치는 한 필에 쌀 두 말, 후기에는 한 필에 쌀 한 말 정도이었고, 5승포는 일종의 고가(高價) 화폐, 그보다 구조가 성긴 3승포가 저가(低價) 화폐 구실을 하였다.

 

 

면포는 조선의 국제무역에서도 매우 중요한 품목이었다. 예컨데 여진족(女眞族)의 상등(上等) 말 한 마리에는 면포 45필, 중등(中等) 말에는 면포 40필, 하등(下等) 말 한마리에는 면포 20필로 거래되었다. 또한 일본(日本)의 은(銀), 동(銅), 소목(蘇木) 등과 면포를 거래하였는데, 성종(成宗) 떄 일본에 대한 면포의 수출량은 약 50만 필에 달하였다. 일본에 목면(木棉)을 수출하여 은(銀) 수입한 뒤, 그 은(銀)을 지불하고 중국에서 비단, 도자기, 서책, 약재 등을 수입하였다. 면포는 동북아시아 무역(貿易) 질서에 중요한 한 축(軸)을 담당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