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중기 재상을 지낸 부림홍씨 입향조인 홍란이라는 선비가 이주해 오면서 마을 이름을 대야(大夜)라 불렀으나 이후 밤야(夜)자 대신 대율(大栗)로 고쳐 부르게 되어 대율리 한밤마을로 불리게 되었다.
마을이 형성되면서 집을 지을 터를 딱을 때 땅 밑에서 파낸 많은 돌을 처리하기 위해 그 돌로 땅의 경계를 삼은 것이 돌담의 시초이다.
수백년된 전통가옥이 수두룩한 가운데 집집마라 온통 돌담으로 되어 있어 내륙의 제주도라 불리기도 한다고 한다.
고려 중기 재상을 지낸 부림홍씨 입향조인 홍란이라는 선비가 이주해 오면서 마을 이름을 대야(大夜)라 불렀으나 이후 밤야(夜)자 대신 대율(大栗)로 고쳐 부르게 되어 대율리 한밤마을로 불리게 되었다.
마을이 형성되면서 집을 지을 터를 딱을 때 땅 밑에서 파낸 많은 돌을 처리하기 위해 그 돌로 땅의 경계를 삼은 것이 돌담의 시초이다.
수백년된 전통가옥이 수두룩한 가운데 집집마라 온통 돌담으로 되어 있어 내륙의 제주도라 불리기도 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