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연기념물 제30호 용문사의 은행나무
종 목 | 천연기념물 제3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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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 칭 | 양평 용문사 은행나무 (楊平 龍門寺 은행나무) |
분 류 | 자연유산 / 천연기념물/ 문화역사기념물/ 종교 |
수량/면적 | 1,810㎡(보호구역) |
지정(등록)일 | 1962.12.03 |
소 재 지 | 경기 양평군 용문면 신점리 626-1 |
시 대 | |
소유자(소유단체) | 용문사 |
관리자(관리단체) | 경기 양평군 |
은행나무는 살아 있는 화석이라 할 만큼 오래된 나무로 우리나라, 일본, 중국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중국에서 유교와 불교가 전해질 때 같이 들어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가을 단풍이 매우 아름답고 병충해가 없으며 넓고 짙은 그늘을 제공한다는 장점이 있어 정자나무 또는 가로수로도 많이 심는다.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나이가 약 1,100살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42m, 뿌리부분 둘레 15.2m이다. 우리나라 은행나무 가운데 나이와 높이에 있어서 최고 높은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줄기 아래에 혹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나무는 통일신라 경순왕(재위 927∼935)의 아들인 마의태자가 나라를 잃은 설움을 안고 금강산으로 가다가 심었다는 전설과 의상대사가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 외에도 나무를 자르려고 톱을 대었는데 그 자리에서 피가 났다는 이야기, 정미의병(1907) 항쟁 때 일본군이 용문사에 불을 질렀는데 이 나무만 타지 않았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나라에 큰 일이 일어날 때마다 소리를 내어 알렸다고도 한다.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조선 세종(재위 1418∼1450) 때 당상관(정3품)이란 품계를 받을 만큼 중히 여겨져 오랜 세월동안 조상들의 관심과 보살핌 가운데 살아온 나무이며, 생물학적 자료로서도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수령(樹齡)은 약 1100여년으로 추정되며, 나무의 크기는 높이가 42m, 뿌리부분의 둘레가 15.2m이며, 가지의 길이는 동서로 29.1m, 남북으로 25.9m이다.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우리나라 노거수의 대표적인 존재인데 그것은 우리나라 은행나무 중 수령과 수고에 있어서 가장 높은 기록을 가지고 있고 또 전설이 담겨 있는데 있다.
이 나무는 용문사 경내에 서 있는데 배수가 잘 될 수 있는 적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줄기 아래쪽에 혹과 같은 큰 돌기가 나있는 것이 특징의 하나이다.
이 나무에는 얽힌 전설이 많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敬順王) 때 태자(太子)였던 마의태자(麻衣太子)가 망국의 서러움을 품고 금강산으로 가던 길에 손수 심었다고 말이 있는가 하면 역시 신라의 의상대사(義湘大師)가 그의 지팡이를 꽂은 것이 이 은행나무로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이것은 삽목신화의 하나로서 세계 각처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용문사는 신라 신덕왕(神德王) 2년 대경대사(大鏡大師)가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그때가 서기 913년에 해당한다. 또 한편으로는 경순왕이 친히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을 고려할 때 이 은행나무의 수령은 약 천년을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나무의 수령이 천년을 넘는지라 그동안 긴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에 각종 피해를 입었을 것이 짐작된다. 그러한 역경을 거쳐오면서 오늘날의 씩씩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가령 정미 의병(丁未 義兵)이 발발했을 때 일본군인들이 절에 불을 놓았으나 이 은행나무만은 해를 면했다는 것이다. 은행나무는 방화수(防火樹)로 잘 알려지고 있는 터이다. 그때 사천왕전(四天王殿)이 불타버렸는데 이 은행나무를 천왕목(天王木)으로 대신했다는 것이다.
이 나무에 대한 전설은 더 있다. 즉 나라에 큰일이 있다던가 변고가 발생하였을 때에는 이 나무는 소리를 내어 그것을 알렸다고 한다. 나무가 소리를 낸다는 말은 외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고종(高宗)께서 승하하였을 때에는 큰 가지 하나가 부러졌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이 이 나무를 자르고자 톱을 대는 순간 톱자리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는 말도 있다.
조선조 세종(世宗)때 당상관(堂上官)이란 품계가 주어졌는데 그 위계는 정삼품(正三品)에 해당된다.
약 60년전 이 나무에 대한 측정치를 보면 눈높이 줄기둘레가 약 10.3m, 수고 약 41m, 그리고 줄기는 지상 12m쯤 되는 곳에서 3갈래로 분기했으며 수령은 천년을 넘는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지금의 수고가 약 67m인 것을 생각하면 숫자를 잘못 적은 듯 하다.
여전히 용문사의 명물인 이 은행나무를 찾는 사람이 많다.
용문사의 은행나무는 우리나라 노거수의 대표적인 존재인데 그것은 우리나라 은행나무 중 수령과 수고에 있어서 가장 높은 기록을 가지고 있고 또 전설이 담겨 있는데 있다.
이 나무는 용문사 경내에 서 있는데 배수가 잘 될 수 있는 적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줄기 아래쪽에 혹과 같은 큰 돌기가 나있는 것이 특징의 하나이다.
이 나무에는 얽힌 전설이 많다.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敬順王) 때 태자(太子)였던 마의태자(麻衣太子)가 망국의 서러움을 품고 금강산으로 가던 길에 손수 심었다고 말이 있는가 하면 역시 신라의 의상대사(義湘大師)가 그의 지팡이를 꽂은 것이 이 은행나무로 되었다는 전설도 있다. 이것은 삽목신화의 하나로서 세계 각처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용문사는 신라 신덕왕(神德王) 2년 대경대사(大鏡大師)가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그때가 서기 913년에 해당한다. 또 한편으로는 경순왕이 친히 이 절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을 고려할 때 이 은행나무의 수령은 약 천년을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 나무의 수령이 천년을 넘는지라 그동안 긴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에 각종 피해를 입었을 것이 짐작된다. 그러한 역경을 거쳐오면서 오늘날의 씩씩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가령 정미 의병(丁未 義兵)이 발발했을 때 일본군인들이 절에 불을 놓았으나 이 은행나무만은 해를 면했다는 것이다. 은행나무는 방화수(防火樹)로 잘 알려지고 있는 터이다. 그때 사천왕전(四天王殿)이 불타버렸는데 이 은행나무를 천왕목(天王木)으로 대신했다는 것이다.
이 나무에 대한 전설은 더 있다. 즉 나라에 큰일이 있다던가 변고가 발생하였을 때에는 이 나무는 소리를 내어 그것을 알렸다고 한다. 나무가 소리를 낸다는 말은 외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고종(高宗)께서 승하하였을 때에는 큰 가지 하나가 부러졌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이 이 나무를 자르고자 톱을 대는 순간 톱자리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는 말도 있다.
조선조 세종(世宗)때 당상관(堂上官)이란 품계가 주어졌는데 그 위계는 정삼품(正三品)에 해당된다.
약 60년전 이 나무에 대한 측정치를 보면 눈높이 줄기둘레가 약 10.3m, 수고 약 41m, 그리고 줄기는 지상 12m쯤 되는 곳에서 3갈래로 분기했으며 수령은 천년을 넘는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지금의 수고가 약 67m인 것을 생각하면 숫자를 잘못 적은 듯 하다.
여전히 용문사의 명물인 이 은행나무를 찾는 사람이 많다.
출처;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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