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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강산 답사

영월 김삿갓 유적지

 

 






▲   김삿갓의 본 이름은  김병연(1807∼1863 金炳淵)으로 당시 세도가인 안동 김문 출신이다.

김병연은 하늘이 부끄러워 평생 삿갓을 쓰고 방랑 생활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김싯갓이라고 부른다.

그는 무슨 사연이 있었기에 죽장에 삿갓쓰고 이거리 저 마을로 생을 방랑으로 마감하였을까?

강원도 영월땅 와석리 노루목(김삿갓 계곡)을 찾으면 그 답이 나온다.
 

노루목 계곡으로 접어들면 '방랑시인 김삿갓 노래비'→ '시비(詩碑)거리'→ '김삿갓 묘'→ '김삿갓 주거지'→ '김삿갓 문학관'  그리고 양념으로  '조선 민화 박물관'이 차례로 나온다.

가요 '방랑시인 김삿갓(김문은 작, 전오승 곡 명국환 오래)' 노랫말에는 김삿갓의 일생이 녹아있다.

 

"죽장에 삿갓쓰고 방랑 삼천리

흰구름 뜬 고개넘어 가는객이 누구냐

열두대문 문간방에 걸식을 하며

술한잔에 시 한수로 떠나가는 김삿갓

세상이 싫든가요 벼슬도 버리고

기다리는 사람없는 이거리 저 마을로

손을 젖는 집집마다 소문을 놓고

푸대접에 껄껄대며 떠나가는 김삿갓 "

 

방랑시인 김삿갓이 간지 146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소설(정비석의 소설 김삿갓,이문열의 '시인' 등) , 드라마(KBS 김삿갓 방랑기 '역사스페셜' 등), 노래(명국환  '방랑시인 김삿갓)로  화폐 속의 인물인 이순신, 세종을 능가하는 수퍼 스타로  끊임없이 회자(膾炙)되고 사랑받고 있다.

 

 

 

 

 

▲    김삿갓은 왜 삿갓을 쓰게 됐나?

(모르고 그러했지만) 그의 할아버지 김익순을 망군(忘君), 망친(忘親)의 벌로 만 번 죽어도 마땅하다고 욕을 하였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를 욕한 사연은 이러하다.

김삿갓은 안동김씨 세도가 집안의 자손으로 태어났으나, 그의 나이 다섯 살 때 홍경래의 난으로 운명이 바뀌게 된다.

선천 방어사 조부 김익순이 반군에 투항함으로써 역적의 집안으로 전락 되었다.
김익순이 데리고 있던 종복(從僕)인 김성수(金聖秀)가 황해도 곡산의 자기 집으로 병하, 병연 형제를 피신시키고 글공부도 시켜 주었다.

여덟 살에 조정의 사면으로 여주, 가평, 평창으로  이사하는 등 폐족(廢族)의 고단한 삶을 살다가 부친이 화병으로 세상을 떠난 후 홀어머니 함평 이씨가 형제를 데리고 강원도 영월  하동면 깊은 산골(김삿갓 계곡)에 정착하여 모친의 후원에 힘입어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글공부에 힘 쓰다가, 스무 살에 결혼한 그 해 1826년(순조 32년), 영월 동헌 뜰에서 백일장에 참가하여 장원을 하였다.

 

 

 백일장의 시제(詩題)는 '논정가산 충절사 탄김익순 죄통우천' (論鄭嘉山 忠節死 嘆金益淳 罪通于天)이었다.
 

김병연은 가산 군수 정시(鄭蓍)의 충절은 찬양을 아끼지 않았고, 선천 방어사 김익순의 불충의 죄는 망군(忘君), 망친(忘親)의 벌로 만 번 죽어도 마땅하다고 신랄히  시를 써 장원을 하였던 것이다.
당시 난고 시인이 장원한 글은 이러하다. 삼자가 읽어도 섬뜩한 내용인데 조부를 이렇게 욕되게 했으니 평생 하늘을 바라볼 수 없는 죄를 ......

 

《 詩題 : 論鄭嘉山 忠節死 嘆金益淳 罪通于天
 

(가산군수 정시를 찬양하고 선천부사 김익순을 규탄하라)

爾世臣金益淳 鄭公不過卿大夫 일이세신김익순 정공불과경대부

將軍桃李농西落 烈士功名圖末高 장군도리농서락 열사공명도말고

詩人到此亦慷慨 撫劍悲歌秋水溪 시인도차역강개 무검비가추수계

宣川自古大將邑 比諸嘉山先守義 선천자고대장읍 비저가산선수의

淸朝共作一王臣 死地寧爲二心子 청조공작일왕신 사지영위이심자

升平日月歲辛未 風雨西關何變有 승평일월세신미 풍우서관하변유

尊周孰非魯仲連 輔漢人多諸葛亮 존주숙비노중련 보한인다제갈량

同朝舊臣鄭忠臣 抵掌風塵立節死 동조구신정충신 저장풍진입절사

嘉陵老吏揚名旌 生色秋天白日下 가릉노리양명정 생색추천백일하

魂歸南畝伴岳飛 骨埋西山傍伯夷 혼귀남무반악비 골매서산방백이

西來消息慨然多 問是誰家食錄臣 서래소식개연다 문시수가식록신

家聲壯洞甲族金 名字長安行列淳 가성장동갑족김 명자장안항렬순

家門如許聖恩重 百萬兵前義不下 가문여허성은중 백만병전의불하

淸川江水洗兵波 鐵甕山樹掛弓枝 청천강수세병파 철옹산수괘궁지

吾王庭下進退膝 背向西城凶賊脆 오왕정하진퇴슬 배향서성흉적취

魂飛莫向九泉去 地下猶存先大王 혼비막향구천거 지하유존선대왕

忘君是日又忘親 一死猶輕萬死宜 망군시일우망친 일사유경만사의

春秋筆法爾知否 此事流傳東國史 춘추필법이지부 차사유전동국사
 

대대로 임금을 섬겨온 김익순은 듣거라.

정공(鄭公)은 경대부에 불과했으나

농서의 장군 이능처럼 항복하지 않아

충신 열사들 가운데 공과 이름이 서열 중에 으뜸이로다.

시인도 이에 대하여 비분강개하노니

칼을 어루만지며 이 가을 날 강가에서 슬픈 노래를 부르노라.

선천은 예로부터 대장이 맡아보던 고을이라

가산 땅에 비하면 먼저 충의로써 지킬 땅이로되

청명한 조정에 모두 한 임금의 신하로서

죽을 때는 어찌 두 마음을 품는단 말인가.

태평세월이던 신미년에

관서 지방에 비바람 몰아치니 이 무슨 변고인가.

주(周)나라를 받드는 데는 노중련 같은 충신이 없었고

한(漢)나라를 보좌하는 데는 제갈량 같은 자 많았노라.

우리 조정에도 또한 정충신(鄭忠臣)이 있어서

맨손으로 병란 막아 절개 지키고 죽었도다.

늙은 관리로서 구국의 기치를 든 가산 군수의 명성은

맑은 가을 하늘에 빛나는 태양 같았노라.

혼은 남쪽 밭이랑으로 돌아가 악비 와 벗하고

뼈는 서산에 묻혔어도 백이의 곁이라.

서쪽에서는 매우 슬픈 소식이 들려오니

묻노니 너는 누구의 녹을 먹는 신하이더냐?

가문은 으뜸가는 장동(壯洞) 김씨요

이름은 장안에서도 떨치는 순(淳)자 항렬이구나.

너희 가문이 이처럼 성은을 두터이 입었으니

백만 대군 앞이라도 의를 저버려선 안 되리라.

청천강 맑은 물에 병마를 씻고

철옹산 나무로 만든 활을 메고서는

임금의 어전에 나아가 무릎 꿇듯이

서쪽의 흉악한 도적에게 무릎 꿇었구나.

너의 혼은 죽어서 저승에도 못 갈 것이니

지하에도 선왕들께서 계시기 때문이라.

이제 임금의 은혜를 저버리고 육친을 버렸으니

한 번 죽음은 가볍고 만 번 죽어야 마땅하리.

춘추필법을 너는 아느냐?

너의 일은 역사에 기록하여 천추만대에 전하리라. 》

 

김병연이 장원 한날 어머니 이씨로 부터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 네가 백일장에서 만고의 역적으로 욕되게 시를 썬 익자(益字) 순자(淳字)를 쓰셨던 선천 방어사는 네 할아버지였다.

너의 할아버지는 사형을 당하셨고 너희들에게 이런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느라고 제사 때 신주를 모시기는커녕 지방과 축문에 관직이 없었던 것처럼 처사(處士)로 써서 너희들을 속여 왔다......"

병연은 너무나 기막힌 사실에 말문이 막혀 버렸다.

'반란군의 괴수 홍경래에게 비겁하게 항복한 김익순이 나의 할아버지라니......'

손자인 자신이 조부를 다시 죽인 천륜을 어긴 죄인이라고 스스로 단죄하고, 뛰어난 학식에도 불구하고 신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할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고민 끝에 삿갓을 쓰고 방랑의 길을 떠나 서민들 속에 섞여서 날카로운 풍자로 상류 사회를 희롱하고 재치와 해학으로 서민의 애환을 읊으며 일생을 보내다가 그의 나이 쉰 일곱, 전라도 땅에서 객사 2년 후 아들 익균이 유해를 영월 와석리 노루목 고향으로 모셔와 시인은 고된 방랑을 멈추고  폐족의 한(恨)을 가슴에 뭍고  고단한 비주류의 삶을 마감하게 된다.

 

 포토리포토.
영월 와석리 노루목 김삿갓 계곡
 

그러면 본격적으로 방랑 시인 김삿갓의 흔적을 찾아 떠나 보자.

영월읍내에서나 봉화 춘양 방면에서 88도로를 타고 와석마을에 이르면 '김삿갓 유적지'.'조선민화 박물관'.'묵산 미술관' 이정표가 눈길을 끈다.

입구부터 구미가 당긴다. 오른쪽은 '방랑시인 김삿갓' 노래비, 왼쪽은 '김삿갓 형상 조각상'을  한컷 씩 담고 노루목을 흐르는 '곡동천'을 따라 오르면 김삿갓으로 시작해서 김삿갓으로  끝나는데,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져 카메라가 바쁘다.

김삿갓 유적지는 그림과 같이 '방랑시인 김삿갓 노래배' → '묵산 미술관' → '조선민화박물관'→'시비거리' →'김삿갓문학관' →'시비거리(김삿갓 묘앞)'→ '김삿갓 주거지' 순으로 둘러보면 좋다.

 

김삿갓계곡의 주연은 김삿갓이지만 조연급으로 등장하는 미술관들이 재미를 더해 준다.

'곡동천'을 따라 노루목 길을 따라 오르다보면 먼저  개울 건너  '묵산 미술관'이 오른쪽으로 보인다. 조금 더 오르면 왼쪽 언덕위 솔숲에 아담한 조선 민화 박물관에 닿는다.

조선민화박물관은 국보급 민화들을 소장하고 전시하는 공간으로 볼거리가 많다.
 볼거리가 많은만큼 입장료도 받는다.

전문 학예 연구사의 해설을 들으며 구경하는데, 이 곳에는 귀신을 쫓아내는 호랑이 민화, 백년해로를 기원하는 기러기 민화, 잘 때도 눈을 뜨고 정신 차리라는 물고기 민화 등을 접 할 수 있다.

"쉿, 19금(禁)"   조선민화박물관 2층 커텐 친 전시실  

2층 맨 안쪽 커튼을 친 전시실에는 조선, 일본, 중국 세 나라 춘화들이 전시되고 있는데, 너무 야해서 감상하기가 좀 민망스럽다.

아이들과 함께라면 주의를 요한다.  조선시대의 야화는 지금보다 더 야한 듯 하다.
자료 사진에서 모자이크를 없애면 눈 뜨고 볼 수 없는 적나라한 그림들이 즐비하다.

다음은 방랑시인 김삿갓이 생전에 거주하였던 '난고 김삿갓 주거지'를 구경할 차례이다.

'난고 김삿갓 주거지'로 가는 계곡길은 시멘트 포장과 비포장이 번갈아 나오는데  노면이 험하여 일반 승용차의 통행은 어렵다.

그리고 산림청 감시원이 차량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차를 '김삿갓문학관 '주차장이나, 서낭당 부근에 두고 가벼운 등산을 하여야 한다.
'난고김삿갓 주거지'까지는 약 오리 길로 자박자박 걸으면 30여분 걸리는데 반 시간 동안 충청북도와 강원도 도계(道界)를 열 한 차례나 오가야 닿는다.

물길 한번 건너면 충북이고, 또 건너면 강원도이다.
시인의 집앞의 개울은 충청북도 단양이고 집터는 영월 땅으로 하늘만 빠곰히 열린 첩첩산중이다.

'난고 김삿갓 주거지'는 본채, 정랑채,난고당으로 이루어 졌는데 초가이다.  
본채에는 현재 삿갓 계곡의 문화해설가인 최상락씨가 살고 있다.

최상락씨는 한복에 상투까지 틀고 있으니 21세기 리틀 김삿갓이라 해도 무방하다.

작은 초가지붕의 난고당에는 난고 시인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본채 마당의  '난고 김삿갓 주거지' 선간판에는  이 집의 내력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 이곳은 조선조 말엽 전국을 바람처럼 떠돌며 날카로운 풍자로 상류사회를 희롱하고 재치와 해학으로 서민의 애환을 읊은 방랑시인 김삿갓이 생전에 거주하였던 곳이다.

선생은 안동 김씨의 시조인 고려 개국공신 신평의 후예로 순조 7년(1807) 3월 3일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회암리에서 부 안근과 모 함평 이씨 사이의 이남으로 출생하였고 본명은 병연 호는 난고이다.

순조12년(1812)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을 때 조부 김익순이 선천부사로 있으면서 홍경래에게 항복하여서 역적으로 몰려 폐족  처분을 받아 가족이 영월로 옮겨와 은둔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도 모친은 자식에게 조부의 사연을 감추고 글을 가르쳤으며 20세 되던 해 영월 동헌에서 백일장에 응시하여 조부를 비판하는 글로 장원이 되었다.

그 후에 조부라는 사실을 알고 자책과 통한을 이기지 못하여 22세에 집을 나서 방랑생활을 하면서 서민들의 애환을 시로 읊어 서민 문학의 큰 틀을 마련하였다.

1863년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에서 작고(당시 57세)하여 그곳에 묘를 썼으며 삼 년 후 둘째아들 익균이 그의 외로웠던 육신을 고향 산천 노루목 양지쪽에 모셨다고한다.

 

현재의 김삿갓 생전의 주거지 건물은 강원의 얼 선양사업의 일환으로 2002년 9월에 복원한 것이다.』

'난고 김삿갓 주거지'를 둘러 보고 내려오면 서낭당, 난고 시인의 묘지와 시비 거리인데 이곳은 볼거리가  많다.

개울을 사이로 충청북도와 강원도가 지경을 이루는데  시인의 묘지는 강원도이고 개울 건너편 시비거리는 충청북도 단양땅이다.

난고 시인이 22세에 집을 나서 방랑생활을 하다가, 57세를 일기로  1863년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에서 객사하여 그 곳에 묘를 썼으나 삼년 후 둘째 아들 익균이 현재의 묘로 옮겨 모셔 지금에 이르고 있다.

시인의 묘에서 11시방향으로 보이는 곳이 '난고 김삿갓 문학관 '으로 안팎이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져 볼거리가 많고 찍을거리도 많아 카메라가 분주하게 된다.

난고(蘭皐) 김삿갓 문학관에서는 난고 선생의 생애와 발자취를 쫓아 일생을 바친 정암 박영국선생의 김삿갓 연구자료가  '난고문학실','일대기실','자료실'에 전시되어 있고, 난고문학실에는 동영상으로 난고 시인의 일대기와 바랑시인 김삿갓 노래가 흘러나와 방문객의 정취를 더해 준다

그리고 난고 김삿갓 문학관 마당에는 여러 시비와 정교하고 컬러풀한 벽화가 그려져 있다.

시비 거리를 지나며  난고 시인의 해학시 농처녀(弄處女)를 떠올리며 웃음을 금치못하였다.

난고 시인이 정을 통한 쳐녀의 풍만함에 장난기가 발동해 던져 본 농담에 쳐녀가 앙칼지게 대꾸하는 재미있는 두 사람의 사랑 시이다.

 난고 시인이

毛深內闊 (모심내활 - 털이 깊고 속이 넓은 것을 보니 )

必過他人 (필과타인 - 반드시 딴 사람이 먼저 지나갔도다. )  이라고 시(詩)로 농을 던지니

처녀 왈

溪邊楊柳不雨長 (계변양류불우장 - 개울가 버들은 비가 오지 않아도 길게 자라고)

園黃栗不蜂坼 (후원황률불봉탁- 뒷마당 알밤은 벌이 쏘지 않아도 벌어져요.) 이라 답을 하였다.

 

김삿갓의 또 다른 해학시 辱說某書堂(욕설모서당) .

눈발리 흩날리고 땅거미가 어둑어둑한 추운 겨울 날  김삿갓이 어느 서당에 찾아가 하룻밤 재워주기를 청하나 훈장은 미친 개 취급하며 내쫓아 버린다. 푸대접에 껄껄대며 辱說某書堂(욕설모서당)이란 한시로 훈장을 욕하였던바, 한자음을 소리나는대로 읽어야 제 맛이 난다.

"서당 내조지이요, 방중 개존물인데,생도 제미십이라 , 선생 내불알이다 ."

書堂乃早知 (서당 내조지이요 - 서당을 일찍부터 잘 알고 있지요)

房中皆尊物 (방중 개존물인데 - 방안에는 모두 존경하는 분인데 )

生徒諸未十 (생도 제미십이라 - 생도는 모두 열 명 못 되는지라)

先生來不謁 (선생 내불알이다 - 선생(훈장)은 와 보지도 않는다.)

2009.12.13 글.사진 르포라이터 정해유

 

 ▲  난고 시인 유적지 안내도

영월이나 봉화 춘양 방면에서 88도로를 타고 와석마을에 이르면 '김삿갓 유적지'.'조선민화 박물관'.'묵산 미술관' 이정표가 눈길을 끈다.입구부터 구미가 당긴다. 오른쪽은 '방랑시인 김삿갓' 노래비, 왼쪽은 '김삿갓 비' 한컷 씩 담고 노루목을 흐르는 '곡동천'을 따라 오르면 김삿갓으로 시작해서 김삿갓으로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져 카메라가 바쁘다. 김삿갓 유적지 그림과 같이 '방랑시인 김삿갓 노래배' → '묵산 미술관' → '조선민화박물관'→'시비거리' →'김삿갓문학관' →'시비거리(김삿갓 묘앞)'→ '김삿갓 주거지' 순으로 둘러보면 된다.

 

 ▲    김삿갓 유적지 들머리 88도로상의 이정표

 

 ▲  김삿갓 유적지 노루목 들머리 이곳에는 '방랑시인 김삿갓 노래비'가 있다.

 

"죽장에 삿갓쓰고 방랑 삼천리

흰구름 뜬 고개넘어 가는객이 누구냐

열두대문 문간방에 걸식을 하며

술한잔에 시 한수로 떠나가는 김삿갓

세상이 싫든가요 벼슬도 버리고

기다리는 사람없는 이거리 저 마을로

손을 젖는 집집마다 소문을 놓고

푸대접에 껄껄대며 떠나가는 김삿갓 "
 

김삿갓의 일생이 녹아있는  가요 '방랑시인 김삿갓' 은 대중이 즐겨 부르는 십팔번으로 사랑받는 노래이기도하다. 우리 나라  역사 인물 중 가요로 불러진것은 김삿갓이 처음일 것이다. 이 노래는 5공 전두환 대통령의 십팔번으로 널리 알려졌고 퇴임 때는   '떠난가는 전삿갓'이라고도 표현하기도 하였다.

그때 그시절의 라디오 연속극 김삿갓북한방랑기 애청자인 50대 이상은  감회가 무량하리라!

 

 

 ▲  노루목 '곡동천'변 솔숲의 '묵상미술박물관'

 ▲  노루목 '곡동천'변 언덕위 솔숲에 위치한 '조선민화박물관'
조선민화박물관은 국보급 민화들을 소장하고 전시하는 공간으로 볼거리가 많다. 전문 학예 연구사의 해설을 들으며 구경하는데, 이 곳에는 귀신을 쫓아내는 호랑이 민화, 백년해로를 기원하는 기러기 민화, 잘 때도 눈을 뜨고 정신 차리라는 물고기 민화 등을 접 할 수 있다.
그리고 조선민화박물관 2층 커텐 친 전시실엔 춘화(민화)들이 전시되고 있는데, 너무 야해서 감상하기가 민망스럽다. 아이들과 함께라면 주의를 요한다.  조선시대의 야화는 지금보다 더 야한 듯 하다. 모자이크를 없애면 눈뜨고 볼 수 없는 적나라한 그림이다.

 

 ▲  방랑시인 김삿갓의 생가지로가는 길목의 '시비거리'

 

 ▲ ▼  이곳은 조선조 말엽 전국을 바람처럼 떠돌며 날카로운 풍자로 상류사회를 희롱하고 재치와 해학으로 서민의 애환을 읊은 방랑시인 김삿갓이 생전에 거주 하였던 곳이다.

선생은 안동 김씨의 시조인 고려 개국공신 신평의 후예로 순조 7년(1807) 3월 3일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회암리에서 부 안근과 모 함평 이씨 사이의 이남으로 출생하였고 본명은 병연 호는 난고이다.

순조12년(1812)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을 때 조부 김익순이 선천부사로 있으면서 홍경래에게 항복하여서 역적으로 몰려 폐족처분을 받아 가족이 영월로 옮겨와 은둔생활을  하였다.

이러한 생활속에서도 모친은 자식에게 조부의 사연을 감추고 글을 가르쳤으며 20세 되던해 영월 동헌에서 백일장에 응시하여 조부를 비판하는 글로 장원이 되었다.

그 후에 조부라는 사실을 알고 자책과 통한을 이기지 못하여 22세에 집을 나서 방랑생활을 하면서 서민들의 애환을 시로 읊어 서민문학의 큰 틀을 마련 하였다.

1863년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에서 작고(당시 57세)하여 그 곳에 묘를 썼으며 삼년 후 둘째아들 익균이 현재의 묘로 옮겨 모셨다.

1982년 김삿갓의 주거지를 발견할 당시 이 곳에서 살았던 엄운섭(당시 64세)의 증언에 의하면 1972년경 주거지 본채의 대들보가 썩어내려 앉아서 철거하고 바깥채에서 살고 있다고 하였다.

화전촌의 집은 모두가 통나무로 짓는 것이 관례인데 이집 본채 자리 철거 목재는 기둥, 천장보 도리 등이 도끼로 정교하게  다듬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어머니가 양반댁의 안목있는 주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의 주거지 건물은 강원의 얼 선양사업의 일환으로 2002년 9월에 복원한 것이다.

 

 ▲  방랑시인 김삿갓의 생가지로가는 길은 계곡으로 시멘트 포장과 비포장이 번갈아 나오는데 일반 승용차의 통행은 어렵다.
차를 시인의 묘 부근에 두고 오리길을 자박자박 걸으면 30여분 걸린다. 시인의 집으로가는 길은 알고 보면 재미있다.
계곡이 도계(道界)로 건너편 시인의 묘지는 영월이고 반대편인 서낭당은 충청북도이다.
삿갓의 집터까지 가는 오리 산길은 열 한 차례나 강원도와 충청북도 도계(道界)를 건넌다. 물길 한번 건너면 충북이고, 또 건너면 강원도이다. 시인의 집앞의 개울은 충청북도 단양이고 집터는 영월땅으로 하늘만 빠곰히 열린 첩첩산중이다.

 

 ▲  방랑시인 김삿갓의 디딜방앗간

 ▲  난고 김삿갓 주거지에는 현재  삿갓계곡의 문화해설까인 최상락씨가 살고 있다. 최상락씨는 한복에 상투까지 틀고 있으니 21세기 김삿갓이라 해도 무방하다

 ▲  김삿갓의 묘 뒷편 강원도 영월땅에서 바라 본 풍경

필자는 충청북도 단양땅에 자동차를 두고 개울 건너 김삿갓의 묘 뒷전에 서 있다. 이 곳은 개울이 강원도와 충청북도 도계(道界)를 이루는 곳으로 시인의 묘지는 강원도 영월땅이고 개울 건너 서낭당과 시비거리는 충청북도 단양땅이다. 왼쪽 건물이 김삿갓 문학관이다.

시인은 20세 되던해 영월 동헌에서 백일장에 응시하여 김익순을 비판하는 글로 장원이 되었으나 ,자기가 비판한 그 분이 조부라는 사실을 알고 자책과 통한을 이기지 못하여 22세에 집을 나서 방랑생활을 하다가, 57세를 일기로  1863년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에서 객사하여 그 곳에 묘를 썼으나 삼년 후 둘째아들 익균이 현재의 묘로 옮겨 모셨다.

 

 ▲  가까아에서 본 김삿갓의 묘

 ▲  김삿갓의 묘앞 개울 건너  충청북도 단양땅에서 바라 본 풍경. 단양땅인 개울 건너에는 시비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  시인의 묘지 앞 개울 건너편의 시비 거리의 詩碑 '환갑

 ▲  시인의 묘지 앞 개울 건너편의 시비 거리의 '시선 김삿갓 난고 선생 유적비(遺跡碑)'

 

 ▲  시인의 묘지 앞 개울 건너편의 시비 거리의 '정암 박영국 선생 功績碑'

 

 ▲  시인의 묘지 앞 개울 건너편의 시비 거리의 '사갓의 노래' 시비

 

 ▲  시인의 묘지 앞 개울 건너편의 시비 거리의 서낭당

 

 ▲  시인의 묘지 앞 개울 건너편의 시비 거리의 시비

 

 

 ▲ 난고 김삿갓 문학관

난고(蘭皐) 김삿갓 문학관에서는 난고 선생의 생애와 발자취를 쫓아 일생을 바친 정암 박영국선생의 김삿갓 연구자료가  '난고문학실','일대기실','자료실'에 전시되어 있고, 난고문학실에는 동영상으로 난고 시인의 일대기와 바랑시인 김삿갓 노래가 흘러나와 정취를 더해 준다.  난고 김삿갓 문학관 마당에는 여러 시비와 정교하고 컬러풀한 벽화가 그려져 눈이 바쁘다.

 

 ▲ 난고 김삿갓 문학관  '난고문학실' 입구

 ▲ 난고 김삿갓 문학관  중앙 현관 모습

 

 ▲ 난고 김삿갓 문학관  '난고문학실' 자료

 

 ▲ 난고 김삿갓 문학관  '난고문학실' 자료

 

 ▲ 난고 김삿갓 문학관  '난고문학실' 자료

 

 ▲ 난고 김삿갓 문학관  '일대기실' 입구

 

 ▲ 난고 김삿갓 문학관  '일대기실' 자료

 

 ▲ 난고 김삿갓 문학관 자료실

 ▲ 난고 김삿갓 문학관 자료실

 ▲ 난고 김삿갓 문학관 자료실

  ▲ 난고 김삿갓 문학관  난고 시인 친필

 

 ▲ 난고 김삿갓 문학관 자료실

 ▲ 난고 김삿갓 문학관 마당의 난고 '허언시 시비'

 

 ▲ 난고 김삿갓 문학관 마당의 난고 '문전 박대 시비'

 

 ▲ 난고 김삿갓 문학관 마당의 난고 '낙엽2 시비'

 

 ▲ 난고 김삿갓 문학관 마당의 벽화 '내삿갓'

 

 ▲ 난고 김삿갓 문학관 마당의 벽화

 

 ▲ 난고 김삿갓 문학관 마당의 벽화 '나를 돌아보며 우연히 짖다'

 

 

 

 ▲ 난고 김삿갓 문학관 마당의 벽화 '스님에게 금강산 시를 답하다'

 ▲ 난고 김삿갓 문학관 마당의 벽화

 ▲ 난고 김삿갓 문학관 마당의 벽화  해학시 辱說某書堂(욕설모서당) .

눈발리 흩날리고 땅거미가 어둑어둑한 추운 겨울 날  김삿갓이 어느 서당에 찾아가 하룻밤 재워주기를 청하나 훈장은 미친 개 취급하며 내쫓아 버린다. 푸대접에 껄껄대며 辱說某書堂(욕설모서당)이란 한시로 훈장을 욕하였던바, 한자음을 소리나는대로 읽어야 제 맛이 난다.

"서당 내조지이요, 방중 개존물인데,생도 제미십이라 , 선생 내불알이다 ."

書堂乃早知 (서당 내조지이요 - 서당을 일찍부터 잘 알고 있지요)

房中皆尊物 (방중 개존물인데 - 방안에는 모두 존경하는 분인데 )

生徒諸未十 (생도 제미십이라 - 생도는 모두 열 명 못 되는지라)

先生來不謁 (선생 내불알이다 - 선생(훈장)은 와 보지도 않는다.)

 ▲ 난고 김삿갓 문학관 마당의 벽화

 

 출처;조선일보 포토르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