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말하면 꼬집은 게 아니라 팔씨름 하다가 세조의
팔을 두 손으로 넘겼다.
그래서 세조가 신숙주를 죽이려고 했다가, 술 취한 것을
감안하여 넘어갔다.
2. 세조는 후궁이 단 한 명뿐이고 평생 중전인 정희왕후와
금슬이 좋았는데,
국사를 논할 때도, 국가의 모든 행사에도 꼭 정희왕후를
대동했으며
사냥을 할 때도 둘이 나란히 말을 타고 사냥에 나갔다.
성종
1. 성종은 후추 중개무역으로 돈을 벌기 위해 후추 씨앗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알아보았지만 결국 후추는 구하지 못 하고 주변국에
성종이 후추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나 계속해서 조공으로 후추가
들어오는 바람에 창고에 후추가 가득히 쌓여,
예쁜 비단 주머니에 담아 조정 관리들에게 다 하사하였다.
연산군
1. 성종과 연산군이 오랜만에 밖에 바람 쐬러 나와서 성종이
"융아, 좋지 않으냐?"하니 연산군이 소떼를 보며
"아바마마 저 송아지도 어미 소가 있는데 저는 왜 어미가 없습니까"라고 말했다.
2. 또 다른 야사에서는 연산이 동궁이었을 때 어느 날 성종에게
거리에서 나가 놀고 싶다고 하여 성종이 허락하였다.
저녁에 동궁이 궁궐로 돌아오자 성종이
"오늘은 밖에서 무엇을 보았느냐?"하고 묻자 연산은
"구경할만한 것은 없었습니다. 다만 송아지 한 마리가
어미 소를 따라가는데
그 어미 소가 울면 송아지도 따라 우니 그것이 가장
부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여 성종이 가여워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전해짐.
3. 공부하는 걸 엄청 싫어하여, 왕자를 훈육하는 학자들이 엄청
고생을 했다고 한다.
매일 꾸중 듣고 야단맞아, 폐비 윤씨 사건이 일어났을 때
모두 죽여버렸다.
4. 춤을 잘 췄다고 한다.
5. 모후인 폐비 윤씨와 고려 공민왕의 비인 노국대장공주의 얼굴이
비슷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관공서에 노국대장공주의 초상화를
수집하게 한 일도 있었다.
6. 엄청난 꽃미남이었다고 한다.
중종
1. 자식 사랑이 남달라서 공주, 옹주랑 왕자들이 오랜만에
문안 오면 눈물을 흘렸다. 오면 버선발로 뛰어나갔다.
2. 또 중종은 동궁 전에서 불이 나자 맨발로 달려나와
훗날의 인종을 애타게 부르며 울었다.
3. 또한 효정옹주의 남편(부마)이 바람을 피우고 다니자
철거지악이었던 질투를 하지 않는다고 딸을 꾸짖은 적도 있었다
.
결국 효정옹주가 남편의 구박을 견디지 못 하고 죽자
직접 부마를 잡아와 친국을 하기도 했다.
인종
1. 인종은 모후인 장경왕후가 자신을 낳고 7일만에 죽자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의 손에 자란다.
하지만 문정왕후는 어린 인종을 끈임 없이 못살게 굴었다.
하루는 밤에 쥐의 꼬리에 불을 붙이고 인종이
잠을 자고 있는 궁 안에 들여 보냈다
.
인종이 창문을 보니 문정왕후가 웃으며 빨리 불이
타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빈궁만 내보내고 자신은 문정왕후에게 효를 행하기 위해
불 속에서 죽으려 했다.
빈궁과 인종이 어쩔 수 없이 불을 바라보며 울고 있는 그때,
밖에서 중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인종은 죽는 것이 문정왕후에게는 효가 되지만 중종에게는
불효가 되므로 곧바로 나왔다
.
그 후 인종은 불을 지른 장본인을 알고 있으면서도
중종에게 고하지 않았다.
명종
1. 다른 사람들은 다 물러가 있거라 하고 노래 잘 부르는
내관이랑
둘이서 내관은 노래 부르게 하고 명종은 그에 맞게 춤추며
2인조 가수 못지 않게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2. 꾀병 부려서 총애하는 내관의 극진한 간호를 받았다.
3. 위의 내관은 동일인물로 남자이다.
4. 내시와 있는 시간이 너무 좋았던 명종은 몸이 아프다고
꾀병을 부려
경연을 취소하고 내관들과 놀러 다니기 일쑤였다.
선조
1. 임진왜란 이후 선조는 의주까지 도망을 하는데,
의주에서 어느 백성에게 생선이 올려진 상을 접대 받았다.
그 생선이 너무 맛있어서 인조가 생선의 이름을 묻자,
백성은 '묵'이라 대답하였다.
선조는 생선의 이름이 그 맛에 비해 별볼일 없다 생각하여
'은어'라 명했다. 나중에 궁에 돌아와 그 생선을 먹었으나...
맛이 전 같이 않아 '도로 묵'이라 하게 하였는데,
바로 여기서 '말짱 도루묵'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광해군
1. 선조가 세자를 가리기 위해 여러 왕자를 시험하였는데
"반찬을 만드는 것 중 무엇이 제일이냐?"라는 질문에
광해군이 "소금이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그 이유를 묻자
"여러 가지 맛을 조화시키려면 소금이 아니면 안 됩니다."
라고 답하여 그 현명함을 인정받았다.
이에 선조가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느냐?"라고 묻자,
광해군은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것이
가장 애통하옵니다."라고 답하였다.
인조
1. 자신의 몸과 봉림대군의 몸이 아프자,
소현세자의 아내가 저주를 내려서 아프다고 하여
사약을 내리고 가족들을 모두 죽였다.
소현세자를 죽일 때 11살과 6살이던 아들들도 다 죽이고
임신했던 세자빈까지 죽였다
효종
1.나르시즘에 빠져, 항상 거울을 볼 땐 스스로 만족에 차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2.일부일처제를 지켰다고 한다.
숙종
1. 신하들이 따뜻한 온돌방에서 꾸벅꾸벅 졸자 온돌을 빼버리고
얼음장에서 일하게 하였다.
영조
1. 연애소설을 좋아하여 가끔 자신의 글에서도 소설을
인용하기도 하였다.
성품이 근검하여 백성들에게 사치를 금하라는 뜻으로
금주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2. 영조의 어진에 나와있는 쌍꺼풀지고 길쭉한 눈과
오뚝한 코에 조그마한
입술은 조선의 남성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미인상이었다.
왕실에서는 이런 외모를 천하다 하여 기피하였으나,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가 양반 사대부가 출신이 아닌
무수리 출신에서 정1품 빈까지 신분상승 한 것을 감안할 때,
숙빈 최씨는 굉장한 미인이지 않았을까.
3. 영조가 왕위에 등극하기 전, 연잉군이었던 시절 달성
서씨 집안의
규수(정성왕후)를 아내로 맞이하여 첫날밤을 치를 때의 일이다.
영조가 아내의 손을 잡고 "손이 참으로 곱다."면서 칭찬을 하자,
연잉군 부인이 무심코 "궂은 일을 해본 적이 없어
그렇다"고 했더니
영조가 그날로 부인을 소박하며 그 다음부터는 멀리하였다.
아마, 무수리로 고생했던 어머니의 거친 손과 발을
생각한 게 아닌가 싶다.
4.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간택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쓰인 방석에
앉지 않자, 그 이유를 물으니 "자식이 어찌 아버지의 존함이
쓰인 방석을
깔고 앉겠습니까." 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또 "고개 중에는 어떤 고개가 제일 넘기 힘드냐"고 묻자,
강원도에서 온 규수가 대관령고개라 답하고
경상도에서 온 규수가 추풍령고개라 답하였다.
헌데 김규수는 보릿고개라 대답하였다.
보릿고개라! 겨울 양식이 봄이 되자 다 떨어지고
그렇다고 햇보리는 아직 나오지 아니한 때
세 끼, 아니 두 끼, 심지어 한 끼를 채우기가 그 얼마나 난감한가.
이것이 보릿고개인데 김규수가 넘기 힘든 고개가 바로
보릿고개라 하니 얼마나 명답인가!
다음으로 꽃 중에 제일인 꽃을 묻자,
김규수는 목화 꽃이 제일이라 답하였다.
이유를 물으니, "목화 꽃이 다른 꽃들보다 화려하지도
예쁘지도 않지만,
핀 연후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면에서는
다른 꽃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유익한 꽃이니, 바로 목화가 백성의 옷감이 되어서
예절도 지키고
품격도 살리고 추울 때 보호하여 주기 때문입니다."라고
답하였다.
정조
1. 정조가 말하길,
"매양 취침하기 전에 두 발바닥의 가운데를 마주 문질러 비비면
기운이 절로 퍼진다.
내가 밤마다 시험해 보았는데,
처음에는 힘이 드는 듯 했으나
오래도록 계속 했더니 신통한 효험이 있다."
2. 연애소설을 비롯한 소설을 무척 싫어하여 영조가 죽고
왕이 되자마자 서고에 있던 모든 소설을 불태웠다.
또한 숙직을 하던 집현전 학자들이 몰래 연애소설을
읽고 있다 들켜서
정조에게 혼이 났고 벼슬을 삭탈했다.
그들은 정조에게 다시는 소설을 안 보겠다는
반성문을 쓰고 나서야
벼슬길을 다시 열어주었다.
3. 영조는 근검하여 백성이 먹을 쌀이 없어진다는
이유로 금주령을 내렸지만
정조는 개인적으로 술을 너무 좋아해서 영조가 죽고
왕이 되자마자 금주령을 없앴다.
4. 공부 못하는 신하한테 공부하라고 끈임없이 시키며,
숙제를 내고 제대로 하지 못하면 망신을 주고
술을 마시지 못하는 신하에게 술을 강요하여
기절할 때까지 마시게 하고,
활을 못 쏘는 신하에게 끈임 없이 연습을 시켰다고 한다.
5. 술을 무진장 좋아하여, 정약용에게 필통에
술 한가득 부어 원샷!
하기를 강요하여 정약용은 술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때 당시 필통에 술 붓기라면,
요즘 사발에 소주를 들이붓는 거와 맞먹는다고 한다.
6. 정조 임금이 정약용한테 높은 벼슬주려고 시험 열었는데
정약용이 1등을 못하고 맨날 3등만 해서 결국 화나서
"경은 그거밖에 못하오?"하면서 베개를 던졌다.
헌종
1. 헌종이 그렇게 미남이었다고 한다.
기록을 보면 여색을 즐기는 왕 때문에 궁궐 내
용모가 예쁘다고 하는
궁녀들은 거의 승은을 입었다고 한다.
(덕분에 후궁첩지도 아무나 내리지 못했음.
딸을 낳은 궁인 김씨도 첩지를 받지 못했다.)
왕 자체가 너무 미남이라 젊은 궁인들이 참 많이
유혹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너무 어린 나이부터 가진 잦은 성관계 때문에
건강이 악화되어
죽기 직전에는 피가래까지 토하며 고생하다가 2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요절한다.
궁녀들이 유혹을 할 정도였으니
엄청난 미남이 아니었나 한다.
2. 헌종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으므로 늘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마음 아프게 여겨
한 신하에게 늘 물었는데,
"진전에 모신 수용이 오히려 매우 닮으신 전하의 용안에
미치지 못합니다."
하니 헌종이 거울을 보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고 한다.
고종
1. 고종황제가 행차하다가 땀을 뻘뻘 흘리며
테니스 라켓을 휘두르는 미국인들의 모습을 보고
"어찌 저런 일을 하인들에게 시키지 않고 귀빈들이 하느냐"
고 안타까워 했다.
2. 명성황후가 죽고 나서 끝까지 재혼을 하지 않았지만
아끼던
후궁이 있었는데 명성황후가 부리던 상궁이었다고 한다.
명성황후는 그녀를 곁에 둔 이유가 못생겨서
고종이 쳐다도 안 볼 것이라고 생각하고 곁에 두었는데
나중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녀는 명성황후와
똑같이 생겼다고 말했다
출처;이복규